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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

by 싱긋 2023. 5. 11.

 

 

동학

동학은 1860년 최제우가 창건한 조선 말엽의 사상으로 이후 손병희에 의해 천도교로 계승되어 발전하였습니다. 동학이란 교조 최제우가 서교의 도래에 대항하여 동쪽 나라인 우리나라의 도를 일으킨다는 뜻에서 붙인 이름이며 1905년에는 손병희에 의하여 천도교로 개칭되었습니다. 당시 동학은 한울에 대한 공경인 경천과 시천주 신앙을 중심으로 모든 사람이 내 몸에 천주를 모시는 입신에 의하여 군자가 되고 나아가 보국안민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경천사상에 바탕한 나라 구제의 신앙이었습니다.

동학의 창시자

동학의 창시자 최제우는 1824년에 태어나 1864년에 사망한 조선 말기 동학의 창시자입니다. 그의 아명은 복술이고 호는 수운이며 본관은 경주입니다. 최제우는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일찍부터 경사를 익혔으나 기울어져가는 가세와 함께 조선 말기의 체제내부적 붕괴양상 및 국제적인 불안정이 그의 유년기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는 세상인심의 각박함과 어지러움이 바로 천명을 돌보지 않기 때문에 나타난 것을 깨닫고 천명을 알아낼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시작하였습니다. 1860년 4월 5일 결정적인 종교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에게 정성을 들이고 있던 중 갑자기 몸이 떨리고 정신이 아득하여지면서 천지가 진동하는 듯한 소리가 공중에서 들려왔습니다. 이런 체험을 통하여 그의 종교적 신념은 결정적으로 확립되기 시작하여 1년 동안 그 가르침에 마땅한 이치를 체득, 도를 닦는 순서와 방법을 만들 수 있게 되었습니다. 861년 포교를 시작하였고 곧 놀라울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동학의 가르침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동학이 세력을 얻게 되자 기존 유림층에서는 비난의 소리가 높아져 서학 즉 천주교를 신봉한다는 지목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때 조정에서는 이미 동학의 교세확장에 두려움을 느끼고 그의 체포계책을 세우고 있었는데 1861년 11월 호남으로 피신을 가게 되었습니다. 1864년 3월 대구감영에서 심문받다가 사도난정의 죄목으로 대구장대에서 41세의 나이로 참형에 처해졌습니다.

동학농민혁명 배경

동학농민혁명은 1894년 동학 지도자들과 동학 교도 및 농민들에 의해 일어난 백성의 무장봉기를 가리킵니다. 이 혁명은 갑오년에 일어났기 때문에 갑오농민운동, 갑오농민전쟁이라고도 합니다. 이 명은 조선 말기 세도정치와 탐관오리들의 수탈, 사회 혼란에 대한 불만이 쌓이다가, 1892년 전라도 고부 군에 부임된 조병갑의 비리와 남형이 도화선이 되어 일어났습니다 이 혁명은 크게 1894년 음력 1월의 고부 봉기(1차), 음력 4월의 전주성 봉기(2차)와 음력 9월의 전주·광주 궐기(3차)로 나뉩니다.

농민혁명의 전개과정

동학농민혁명의 전개과정은 1894년 1월부터 7월까지 네 단계로 이루어졌습니다. 첫 번째 단계는 고부 농민 봉기로 전봉준이 조병갑의 횡포에 항거하여 농민군을 이끌고 관아를 습격하고 곡식을 나눠준 시기입니다. 두 번째 단계는 동학 농민군의 절정기로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 등이 보국안민과 제폭구민의 기치를 내걸고 전라도의 여러 지역을 공략하고 전주를 점령한 시기입니다. 세 번째 단계는 동학 농민군의 전국 확산기로 동학 농민군이 전라도에서 충청도, 경상도, 강원도로 확대하고, 정부와 일본군과 전투를 벌인 시기입니다. 네 번째 단계는 동학 농민군의 몰락기로 일본군의 강력한 공격과 정부의 배신으로 동학 농민군이 전라도로 후퇴하고 결국 전봉준이 체포되고 처형된 시기입니다.

동학농민혁명의 목적

동학농민혁명의 목적은 국가와 관리들에 대한 불신과 농민들의 분노로 인해 발생했던 혁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는 부패 척결과 내정 개혁, 그리고 동학 교조 신원 등의 기치로 일어선 동학농민군 중 일부는 흥선대원군, 이준용등과도 결탁했습니다.

동학농민혁명의 주요 인물

동학농민혁명의 주요 인물로는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 최경선, 최시형, 손병희 등이 있습니다. 이들은 동학농민군의 지도자들로서 혁명을 주도하였습니다.

동학농민혁명 원인

동학농민혁명의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당시 조선의 지배층의 수탈과 외세의 경제 침탈로 농민들이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전라도 고부 군수 조병갑의 부패와 수탈에 대한 반발도 있었습니다. 동학 지도자들과 동학 교도 및 농민들은 나라 일을 돕고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는 보국안민을 내세워 무장봉기를 일으켰습니다.

동학농민혁명의 결과

동학농민혁명의 결과로 동학농민군은 패배했습니다. 민 씨 정권에서는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청나라 군과 일본군을 번갈아 끌어들여 결국 농민 운동 진압 후 청일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