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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쉐 로고변경, 역사

by 싱긋 2023. 6. 15.

 

 

포르셰 로고변경

포르셰가 15년 만에 브랜드 로고를 수정했습니다. 새로운 로고는 포르셰 스타일링 및 마케팅 전문가가 3년을 몰두해 제작했습니다. 새로운 로고는 방패 문양 가운데 말 위에 STUTTGART 레터링을 다시 부활시킨 게 가장 큰 변경점입니다. 이외 디테일한 패턴도 가다듬었습니다. 상단의 PORSCHE 레터링과 4시 11시의 배경을 매끈하게 매만져 시인성을 좋게 했습니다. 1시와 7시 방향 패턴 중 붉은색 배경에 허니콤 장식도 추가했습니다. 이전 로고와 비교하면 이러한 부분들이 차이점입니다. 포르셰는 새로운 로고를 2023년 말 생산하는 차부터 적용할 예정입니다. 이에 앞서 75주년 이벤트로 발표되는 콘셉트카를 통해 최초로 선보일 예정입니다.

포르셰 역사

자동차계에 길이 남을 천재 공학박사 페르디난트 포르셰와 그의 아들 페리 포르셰가 1931년 설립 후 1948년 폭스바겐 비틀 기반의 스포츠카이자 포르셰의 첫 번째 자동차인 포르셰 356을 만들면서 시작하였습니다. 356의 별명이 점프하는 개구리였고 356 이후 포르셰에서 나오는 차량들은 개구리라는 별명이 붙여 습니다. 페르디난트는 히틀러 총통이 국민차 개발을 의뢰했던 바로 그 사람입니다. 원래 기계 쪽에서는 천재여서 세계 최초의 하이브리드 자동차인 믹스테를 1899년에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구조적으로는 110년 뒤에 생산된 쉐보레 볼트나 아우디 A1 e 트론과 이미 비슷했습니다. 폭스바겐과 포르셰는 사실상 한 가문에 의해 창립된 가족 기업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페르디난트 피에히의 자서전 자동차에서도 자주 언급됩니다. 포르셰의 전통 중 하나로 키홀더가 핸들 오른쪽에 있는 다른 차량과는 달리 포르셰 차량들은 전통적으로 왼쪽에 위치합니다. 초창기 자동차 레이싱은 운전자가 차량 밖에서 대기하다가 신호가 떨어지면 차량에 탑승하여 출발하는 형식이었는데 이때 왼손으로 차량의 시동을 걸며 오른손으로는 기어변속을 하며 바로 출발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습니다. 창립자인 페르디난트 포르셰는 2차 대전 종전 후 전범으로 체포되어 1945년 12월부터 복역하고 1949년에 풀려난 뒤 병을 얻어 1951년에 사망했습니다. 이후 그의 아들인 페리 포르셰가 경영 전반에 뛰어들어 탁월한 경험과 경영 능력을 바탕으로 차츰 회사의 규모를 성장시켰습니다. 간판 차종인 911은 1963년 등장했습니다. 한동안 911 차체에 356의 4 기통 엔진을 얹은 912를 팔기도 했고 912의 뒤를 이어 911 아랫급 모델로 914를 폭스바겐과 함께 개발해 만들기도 했지만 많이 팔지는 못했습니다. 911의 후속 모델로 개발한 포르셰 928도 있었지만 포르셰에 그란투리스모 차량 하나를 추가시켰을 뿐 911을 대체하지는 못했습니다. 결과적으로 196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초까지 포르셰가 만들어 성공한 차는 911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1990년대 초 방만한 경영으로 회사를 말아먹을 뻔한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대주주였던 폭스바겐이 경영에 개입해 간신히 구사일생했습니다. 이 시기에 포르셰는 FR 레이아웃에 4 기통 3000 cc 쿠페 968을 생산하였는데 이게 1976년에 나온 924를 발전시킨 944를 다시 한번 발전시킨 차입니다. 4 기통 FR 라인업을 무려 20년이나 우려먹을 수밖에 없을 정도인 상황이었습니다. 1980년대에 911을 바탕으로 4 도어 세단 989 모델을 만들려고 했지만 그 이후 회사에 위기가 닥치며 중단되어 버렸습니다. 포르셰의 흑역사들이었습니다. 당시 만들려고 했던 989는 911에 문짝 2개가 늘어난 디자인으로 당시로서는 괴상하게 보였는데 나중에 파나메라라는 이름으로 부활했고 1990년대 포르셰가 처했던 상황은 대한민국으로 치자면 IMF급으로 그야말로 부도 직전까지 갔지만 살아남기 위해 호구지책으로 만든 모델이 바로 박스터 986입니다. 개발비를 절감하고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당시 개발 중이던 수랭식 996은 결국 그 이전 모델인 993은 포르셰 최후의 공랭식 911이 되었습니다. 포르셰 차량의 외관 아이덴티티 중 하나인 개구리눈을 달걀프라이 모양으로 수정함으로써 팬들이 격렬하게 반발하는 일도 일어났었습니다. 911의 반값이라는 옵션 없는 깡통 모델로 구입하면 3~4할 정도가 떨어져 평범한 고급 세단 정도의 가격으로 구입할 수 있었던 박스터는 공전의 대히트를 기록해 포르셰를 살려내게 되었습니다. 박스터 프로젝트와 더불어 회사 체질을 개선한 벤델린 비데킹은 단숨에 스타 경영자로 세계의 주목을 받기도 했습니다. 새로운 모델들 덕분에 부도 위기를 이겨냈을 뿐 아니라 인수당하는 다른 스포츠카 브랜드들의 운명과는 사뭇 대조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게 되지만 보수적인 골수팬들의 반대는 도무지 그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997에 와서는 헤드램프가 개구리눈으로 되돌아갔으나 그를 제외한 전체적 디자인은 996을 계속 계승했습니다. 이후에는 전 세계적인 SUV 붐에 주목하여 폭스바겐과 공동 개발로 포르셰 최초의 황소개구리 SUV인 카이엔을 내놓았는데 절묘하게 적중하여 대히트작이 되었습니다. 현재에도 포르셰 매출의 대부분은 718 듀오 박스터 카이맨, 카이엔에서 나옵니다. 카이엔의 생산에 맞춰 포르셰는 라이프치히에 공장을 신설하고 라이프치히 공장에서는 마칸, 파나메라가 생산되고 있으며 카이엔도 2세대까지 라이프치히에서 생산했습니다. 카이엔은 차체만 투아렉, Q7이 생산되는 폭스바겐의 슬로바키아 브라티슬라바 현지공장에서 제작한 후 라이프치히로 옮겨 조립을 끝냈으나 3세대부터 브라티슬라바 완전 생산으로 전환했습니다. 911 등 플래그십과 스포츠카들은 슈투트가르트 주펜하우젠 공장에서 계속 생산되고 있습니다. 고부가가치의 브랜드 파워와 다양한 라인업의 차량들을 대량 생산하는 사업 구조 덕분에 2017년도에 거둔 실적은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수준인 매출 234억 9100만 유로에 당기순이익은 31억 3900만 유로로 대한민국 기업과 비교하면 매출은 기아자동차의 40퍼센트에 불과하지만 당기순이익은 3.5배에 달하여 동종업계 최고 수준의 수익성을 내었습니다. 포르셰의 역사는 승리의 역사입니다. 승리는 스스로 연구를 거듭하고 때로는 자신의 개성까지 포기하며 오직 빠르지만 누구나 탈 수 있는 차를 만들겠다는 창업자 페르디난트 포르셰의 이념이 이어졌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음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