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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10일 민주항쟁, 기념일 행사, 만세운동

by 싱긋 2023. 6. 10.

 

 

6월 10일 민주항쟁

6월 10일 민주항쟁은 1987년 6월 10일부터 6월 29일까지 전국적으로 일어난 반독재 민주화 운동입니다. 이 운동의 배경으로는 1979년 12월 12일 사태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 당시 대통령이 대통령 직선제 헌법 개정을 포함한 민주체제를 요구하는 민주화 운동에 대해 강경 탄압으로 일관했다는 점이 있습니다. 이 외에도 전두환 대통령의 호헌 조치,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이한열 최루탄 피격 사건 등이 도화선이 되어 전국적인 시위가 발생하였습니다.

전두환 대통령 호헌 조치

전두환 대통령의 호헌 조치는 1987년 4월 13일에 취한 조치로 일종의 특별 선언이기도 합니다. 이 조치는 말 그대로 현행 헌법을 유지한다. 즉 보호한다 수호한다 지키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 조치는 모든 개헌 논의를 금지하는 조치였습니다.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은 1986년 6월 5일 경기도 경찰국 부천경찰서의 수사과 조사계 소속 형사였던 문귀동 경장이 학생운동가 권인숙을 성고문한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1988년까지 2년간의 재판 끝에 가해자가 처벌되었습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은 1987년 1월 14일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대한민국 경찰 수사관들이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학생 박종철을 심문하던 중 물고문으로 요절에 이르게 한 사건입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성공회 서울주교좌대성당에서 집회가 시작되었고 6월 항쟁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다고 평가받습니다.

이한열 최루탄 피격 사건

이한열 최루탄 피격 사건은 1987년 6월 9일 연세대학교 학생 이한열이 6·10 대회 출정을 위한 범연세인 총궐기 대회에서 시위대의 일원으로 참여하던 중 전경들이 수평으로 발사한 최루탄에 뒷머리를 피격당해 쓰러진 사건입니다. 이한열은 이 사건으로 인해 응급실로 옮겨졌으나 한 달 동안 사경을 헤매다가 1987년 7월 5일 22세의 나이로 사망하였습니다. 이 사건은 전국에 알려지면서 학생과 시민들의 광범위한 분노를 불러일으켰습니다.

민주항쟁기념일 행사

민주항쟁 기념행사는 6월 한 달 동안 서울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는 민주화운동 계승 단체 등 63개 단체가 참여한 행사위원회가 준비한 32개의 기념행사가 열립니다. 6월 9일 서울글로벌센터에서는 한국 민주주의, 도전과 전망을 주제로 6월 항쟁 36주년 기념 학술토론회가 열리고 같은 날 푸르지오아트홀에서는 전야제 행사인 민주가 민주로 가 개최됩니다. 6월 10일에는 명동성당에서 36주년 6월 10일 민주항쟁 국가기념식이 진행됩니다.

만세운동

만세운동은 일제강점기에 있던 조선인들이 일제의 지배에 항거하여 1919년 3월 1일 한일 병합 조약의 무효와 한국의 독립을 선언하고 비폭력 만세 운동을 시작한 사건입니다. 약 3개월가량의 시위가 발생하였으며 조선 총독부는 강경하게 진압했습니다. 일제는 군사 경찰에 의한 강경책을 펴던 조선 총독부는 민족 분열책인 일명 문화 통치로 정책을 바꾸게 되었습니다. 만세운동을 계기로 다음 달인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수립되었습니다. 이 운동은 기미년에 일어났다 하여 기미독립운동 줄여서 기미운동이라고도 부릅니다. 만세 운동을 주도한 인물들을 민족 대표 33인으로 부르며 이외에 만세 성명서에 직접 서명하지는 않았으나 직접적, 간접적으로 만세 운동의 개최를 위해 준비한 이들까지 합쳐서 보통 민족 대표 48인 또는 프랭크 스코필드를 포함 민족대표 49인으로도 부릅니다.